View this article in English | bilingual

고난의 행군

우리 가족은 탈북 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우리는 임시 여권을 떼서 중국의 친척 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도 다녀오고 또 어머니도 다녀오는 등 우리 집은 그 산골에서 잘 사는 계급에 속한 것만 같았다.

자재지도원이라는 직책으로 출장을 많이 다니던 아버지는 워낙 마음이 어질고 고지식하며 자상한 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아버진 사람들에게서 신용을 얻은 분이었기 때문이며 흠이라면 술을 좋아해서 가정보다는 기업소나 친구들에게 더 잘하고 가정 일에는 관심을 덜 쓰는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의 시기가 닥쳐왔다. 국제적 고립과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로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을도 식량난이 절정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죽을 먹으며 직장에 출근했고 배급이라곤 아예 주지 않았으며 배급소조차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다. 배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모두들 봄이 되면 언 감자를 주우러 다녔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나물을 캐러 산속을 누볐는데 나의 꿈이 음악가에서 문학가로 다시 바뀐 것이 이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전공하라고 가르쳤고 나 스스로도 음악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 왔는데 “고난의 행군”이 달려들면서부터 보이는 모든 현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책 속의 주인공으로 실어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장사까지 해가며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물건이나 쌀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팔아 생활을 했고 쌀이 없으면 또 여권을 떼어 중국에 가서 쌀을 가지고 오곤 했는데 그때까지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걸 팔아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면 자재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직장의 물자들을 거래하는 일들을 했기에 장사를 너무도 잘 알았던 아버지는 장사를 못하는 그런 어머니를 항상 나무랬다. 하지만 장사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로서는 아버지의 그 나무람을 그저 참고 들어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중국의 친척들 덕분에 우리는 남들보다 옷도 잘 입고, 신발도 좋은 걸로 신고 다녔으며 학교에 다니고 먹는 것도 고급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잘 살았지만, 우리 집에도 서서히 생활난이 시작되었다. 

중국에 계시는 친척들이 다들 한국으로 돈 벌러 가버려서 중국에 가도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와 여동생 명순, 남동생 명국 이렇게 셋은 먹지 못해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다리에 골수염이 있던 어머니는 아무 일도 못했으며 아버지도 출장에서 돌아오면 우리와 함께 소나무 껍질인 송기를 벗기러 다녔다. 송기란 소나무 겉껍질을 낫 아니면 칼로 한번 벗겨 낸 그 속에 있는 얇은 껍질을 말한다. 그걸 한 배낭씩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동생들은 산나물을 뜯고, 나와 아버지는 낫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송기를 벗기고 집으로 와서는 산나물은 끓는 물에 데쳐 내서는 죽을 쑤었다. 

송기는 가마에 양잿물을 넣고 오래도록 끓인 후 물에 하루 동안 펴서 재워놓고 다시 방망이로 두드려서는 옥수수 가루 한 줌을 넣고 떡을 만든다.

당시 그 송기떡이 목에 넘어가지를 않아서 정말 속상했었는데 그렇게 못사는 것이 북한의 독재 정권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서럽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 달에 한 번씩 강연회를 하는데 그때마다 하는 강의 내용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산이 많고 논과 밭이 적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와야 한다. 하지만 수입하는 도중 쌀을 실은 배를 경제봉쇄 하는 미국에서 총질을 해 다들 희생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미국 때문에 이렇게 생활난을 겪는단다.

 

이와 같은 사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우리의 철천지원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의 일 때문에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 보니 그 가장의 자리를 내가 메워야만 했다. 땔 장작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기업소 소를 빌려서 나무를 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왔는데 정말이지 매우 힘들었다. 나무를 톱으로 벤다는 게 어린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없는 힘을 다해서 나무를 베면 그 나무가 내게로 넘어와 팔이나 발을 다치기 일쑤였고 너무도 힘들어서 쌓인 눈 위에 철퍼덕 앉아 울 때도 많았다. 닳아진 신발을 신고 장갑도 없이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며 나무를 베는 내가 미웠고 소로 나무를 해오는 동네아저씨들이 부러웠다. 나무가 무거워 힘에 부치니 밧줄로 질질 끌고 오면 동네 사람들은 ‘너, 힘들겠다….’하고 말만 할 뿐 도와주지는 않았다.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 내 나이 17살, 나무하기가 그처럼 힘든 만큼 나무를 아끼려 불을 조금씩 땔 수밖에 없다 보니 방바닥에 습기가 많아 불을 땔 적마다 연기가 나서 문을 항상 열어놓고 밥을 해야 했으므로 방안에서도 솜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온돌을 놓고 시멘트로 바르고 그 위에 장판지를 밀가루 아니면 옥수수 가루로 쑨 풀로 발랐는데 불을 때지 않아 습기가 많아지면 방바닥에 바른 장판지가 모두 들뜨고 일어나 시멘트를 바른 방바닥이 드러났다.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지 않고 아궁이로 나왔기 때문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방바닥을 뜯어서 온돌 수리를 했는데 17살 소녀가 온돌수리를 한다고 해야 얼마나 잘하랴! 방바닥을 뜯어내려니 곡괭이질을 해야 했고 얼굴에 온통 숯검댕이를 묻히고 짧은 팔로 큰 돌 사이를 헤집으니 옷도 숯검댕이가 되어 버렸다. 굴뚝으로는 연기가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방바닥의 온돌과 온돌 사이에 그을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을 다 꺼내야만 했다. 그래서 온돌에 놓인 돌들을 들어내고 그을음을 꺼내야 하지만 힘이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긴 쇠줄에 헝겊을 동여매고는 그것을 온돌 사이에 쑤셔 넣은 다음 그을음을 앞으로 당겨서 작은 삽으로 퍼냈는데 엎드린 자세에서만 이 작업이 가능했으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무리로 뜯어낸 온돌을 다시 메우는 작업은 진흙으로 해야 했는데 엄동설한에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찬물에 진흙을 이겨 온돌 사이를 메우는 것이 당시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하시지, 동생들은 어리지, 정말 나 혼자서 너무도 힘들었다.

조금만 성숙한 나이였으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아직 엄마, 아빠의 그늘 아래 부모가 해주는 데로 생활해야 할 나이에 동생들을 챙기고 아프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고 내 어깨에는 점점 무거운 짐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점점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기업소 일 때문에 지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으며 봄이 되면 기업소의 비료 때문에 은덕군으로 가야만 했다. 비료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지만 가난한 기업소에서는 거래 돈을 아버지에게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집에 있던 녹음기며, 재봉기며 TV 등을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잘사는 집에서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비료는 기차방통으로 기업소에 들어왔었고 비료 없어 헤매는 농장에 비해 기업소는 그해 농사 비료는 끄떡없게 되었지만, 결국 집의 살림은 쪼들리는데도 집의 재산을 기업소에 바친 셈이 된 것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여권을 떼어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사는 고모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덕분에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지고 오셨다. 그것으로 한동안은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빌린 돈 때문에 그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빚 꾼들은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매일 찾아왔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돈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자가 불어서 빌린 돈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그 이자만 갚는다 해도 아득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업소에 찾아가 돈을 요구해 보았지만, 지배인이라는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드디어 생각을 고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가족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하고 말이다. 북한 체재의 와해 조짐을 본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을 노예로 담보 잡아 평양 주민들만 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북한 정권은 평양 주민 3백만 명을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2천만 명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을 시키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중국으로 가자는 놀라운 말을 했다. 나는 물론 어머니와 두 동생들도 깜짝 놀랐다. 웬일로 중국으로 가려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여기에서 이렇게 해서는 앉아서 굶어 죽는다며 하루가 멀다 하게 빚 꾼들이 오고 기업소에서는 나 몰라라 하는데 어떻게 살겠느냐고 했다.

중국에 가서 한국 방송을 들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남조선은 잘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생각에 남조선에는 거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못 간다고 했다. 

우리 가족의 고난의 그림자가 드디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